가치투자 이론

[피터 린치] 거시경제 이벤트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부분

미카엘12 2022. 5. 9. 08:10

피터린치 -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에서 거시경제 이벤트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부분

나는 1960년 케네디 대통령 선거 시점부터 주식투자를 해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돌아보면 그동안 주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여러 가지 뉴스와 사건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살 어린 나이였던 나는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되면 항상 주식시장이 내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선거 다음 날인 1960년 11월 9일에 주식시장이 조금 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서 미국 해군이 러시아 함정들을 봉쇄했을 때(미국이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유일한 시점이었다), 나는 내 자신과 가족,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런데도 그날 주식시장 하락폭은 3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7개월 뒤, 케네디 대통령은 유에스 철강을 질타하고 철강가격 인하를 독촉했다. 경험에 비추어 나는 그 정도 일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식시장은 7퍼센트에 이르는 역사상 최대 수준의 낙폭을 기록했다. 월스트리트의 입장에서는 핵무기에 대한 대량학살 위험보다 대통령의 기업 간섭이 더 무서웠던 것일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보스턴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날에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소식이 캠퍼스를 술렁이게 했다. 나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세인트 메리스 홀로 기도하러 갔다.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암살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주식거래가 중단되었지만, 낙폭은 3퍼센트 미만이었다고 했다. 사흘 뒤 시장은 11월 22일의 낙폭을 만회하고도 더 올랐다.

1968년 4월에 존슨 대통령은 차기 대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대한 공습 중단 및 평화회담 지지를 발표했다. 이 발표 이후 시장은 2.50퍼센트 상승했다.

1970년대에 나는 피델리티에서 줄곧 주식에 몰입하며 내 본업에 전념했다. 이 기간에 발생했던 주요 사건과 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닉슨 대통령이 가격 통제를 실시하자 시장은 3퍼센트 상승했다. 닉슨 대통령 사임했을 때에는 1퍼센트 하락했다(닉슨이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주식을 사겠다고 말하자, 월스트리트의 한 재담꾼은 닉슨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자기도 주식을 사겠다며 응수했다). 인플레이션 극복을 표방하며 포드 대통령이 ‘WIN Whip Inflation Now’을 도입하자 시장은 4.6퍼센트 상승했다. IBM이 대형독점금지법 위반소송에서 승리했을 때 시장은 3.3퍼센트의 상승세를 보였다.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소폭 상승했다. 1970년대는 1930년대 이래 주식 시장이 가장 부진한 10년이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발생한 날에는 일일 변동률이 모두 상승세를 보였다.

가장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73년 10월 19일(이번에도 10월 19일이다!)에 발생한 석유수출국기구 OPEC의 석유수출 금지조치였다. 이로부터 3개월 뒤에 시장은 16퍼센트 하락했고, 12개월 뒤에는 39퍼센트나 내려갔다. 시장이 수출 금지조치에 처음에는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은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이 조치가 나온 당일에는 4포인트가 올랐고, 이후에 이어진 5회 개장 동안에는 14포인트가 추가로 오른 다음에야 하락행진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시장은 개별 종목과 마찬가지로 단기적으로 일반적인 기대치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석유수출 금지조치가 시행되자 휘발유 가격은 올라갔다. 주유소 앞에 자동차가 장사진을 이뤘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으며, 이자율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1980년대에는 이례적으로 큰 등락폭을 보인 날이 어느 때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동은 대국적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은 의미가 없었다. 장기투자자에게 미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겨보자면 1987년 10월의 508포인트 폭락은 1985년 9월 22일 재무장관회의보다 훨씬 아래에 놓인다. 주요 선진국들이 경제정책협력과 달러화 평가절하에 합의한 것이 바로 이 G7회의였다. 이 결정이 발표된 후 시장은 6개월 동안 38퍼센트 상승했다. 이 결정은 달러 약세로부터 혜택을 받는 특정 기업들에게 더 극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그로부터 2년 동안 2~3배로 뛰었다. 1987년 10월 10일과 마찬가지로 나는 제4차 중동전쟁과 G7 회의 때에도 유럽에 있었지만, 이때는 골프장에서 헤매는 대신 기업을 방문하고 있었다.

당시의 다양한 추세와 그로 인한 점진적인 변화들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6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 복합기업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결과 많은 대기업이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다 쓰러졌다. 그리고 이후 이들이 경영 능력을 회복하는 데는 15년이 걸렸다. 결국 돌아오지 못한 기업들이 많았다. 걸프 앤드 웨스턴, 국제전화통신회사, 오그덴과 같은 기업들은 회생주로 다시 일어섰다. 1970년대에는 고품질 우량주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 니프티 피프티가 바로 이 우량주들을 말하는 것인데, 한번 사서 평생 보유한다는 의미로 ‘1회 결정’ 종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과대평가된 이 우량주들은 잠시 주주들에게 횡재를 안겨준 뒤, 1973년 1974년 사이에 시장이 붕괴하면서 50~90퍼센트까지 폭락했다.
1982년 중반부터 1983년 중반까지 투자자들의 애정공세를 받은 것은 소형기술주였다. 하지만 이 종목들도 역시 60~98퍼센트까지 폭락했다. 작은 것이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수익성이 좋은 것은 아니다.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일본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니케이 지수가 17배나 올랐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다우존스 지수는 겨우 2배 올랐을 뿐이다. 1987년 4월에는 이본 주식의 시가총액이 미국 주식을 실제로 추월했고, 이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일본사람들의 주식에 대한 사고방식이 독특하다. 나는 이들의 생각을 아직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을 조사하러 일본에 갈 때마다 나는 모든 주식이 심각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도 일본 주식은 여전히 오르고 있다.